8월의 추천

‘도서관 추천’ 이달의 황룡필독서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김훈의 『칼의 노래』는 세계해전사에 큰 흔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 ‘성웅’의 반열에 오른, 그래서 국가적 위기 상황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오는 이순신을 다시 불러내 재해석한 소설이다. 하, 그런데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과 다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더 이상 왜(외)적의 침입 때문에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원한 영웅이 아니다. 물론 『칼의 노래』에 그런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상징은 다만 배경으로 깔려 있고, 『칼의 노래』는 여기에 아주 혁신적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래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근대라는 곤경을 넘어설 가능성을 지닌 포스트 모던 이순신이 된다.

『칼의 노래』는 의미심장하게도 이순신이 왕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받고 백의종군 하는 그 시점부터 시작한다. 흔히 영웅이 되기 위한 시련과 이순신의 나라를 위한 사랑을 증명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이 장면에 대해 『칼의 노래』는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왜 당시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거의 유일하게 왜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던 이순신을 소환해서 모질게 문초하고 급기야 모든 관직을 박탈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순신이 왜적장인 가토 부대와의 전투를 회피하는 등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럼 문제는 그때 왜 이순신은 그 가토부대와의 싸움에 임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일 터인데, 『칼의 노래』는 만약 가토의 머리를 위해 무모하게 그 싸움에 임했더라면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적과 맞설 수 있었던 수군이 전멸할 수 있다(실제 이후 전투에서 원균부대는 당시 조선 수군의 전부를 잃는다. 12척의 전함만 남겨놓은 채.)는 전략적 선택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가토는 임진년 출병의 제 1진이었다. ……임금은 가토의 부대에 쫓겨 의주까지 달아났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 했다.

임금은 진실로 종묘사직 제단 위에 가토의 머리를 바치고 술 한 잔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웅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정은 이순신의 이러한 선택을 조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며, 『칼의 노래』는 이 장면에서 인간 사회를 유지해온 어떤 원리를 제시한다. 바로 푸코적 의미의 통치성이라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모든 생명체들을 개별적인 체험을 포획하고 지도하고 차단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통치성 혹은 장치들을 오늘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한다. 우리가 문명 속에서 행복할 수 없는 연유가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라는 이 명징한 사실마저도 또 다른 의미로 왜곡시키거나 아예 원초적으로 억압하는 장치들, 그리고 그 장치들의 네트워크에 있다는 것일 터인데, 이 문제의식이야말로 굳이 푸코나 아감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대단히 놀라운 통찰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장치들에 의해 포획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는 각 개인들의 개별적 체험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떤 진리도 깃들어 있지 않은 권위들에 순종하는 신체로 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외면적인 복종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러니까 우선 왜적 싸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싸움을 한다. ‘바다의 사실’에 기초해 어렵게 어렵게 전투를 이어가는 이순신을 각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절대복종시키려는 당시의 통치체계와도 싸움을 벌인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이 ‘허망하고 무내용한’ 장치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넘어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들 모두는 순종하는 신체들로 살아가야 하고 인간 사회는 움직이는 기계들의 서식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어떤 상징적 질서에도 기입되지 않으려 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정치-장치의 개입이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전쟁터에서도, 아니, 전쟁터이니 오히려 더 자유인이고자 한다. 그러자 전쟁의 당사자들 모두가 적이 되어 이순신을 굴복시키려 하고, 이순신은 그 전방위적 공세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그 결과 이순신의 적은 한 평자의 지적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왜군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의 적은 왜군을 비롯하여, 조선의 장수라는 자신의 공적 지위에서 볼 때 적이 아닌 존재들-백성, 임금, 명나라장수-까지도 아우’르는 상황이 발생한다. 여기에 소문, 죽은 자, 비겁, 왕이 교서, 허무 등등까지를 감안하면 이순신의 적은 자신을 둘러싼 거의 모든 존재들이다. 이런 온갖 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단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며, 결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순신은 전사의 형식을 빌어 자연사(혹은 자살)을 택한다. 이순신은 두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실재적으로 죽고 그 이후 또 한 번 상징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결국은 상징-장치들에게 포획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 전사의 형식을 빈 상징적 자살이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듯 죽음의 개별성의 지켜내야 개별자로서 산 것이 된다는 투로 이순신은 개별자로서의 죽음 혹은 단독자로서의 죽음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영웅이다. 국가-장치에 포획된 영웅이 아니라 국가-장치로부터 포획되지 않으려 스스로 자살을 택한 영웅인 것.

이처럼 『칼의 노래』는 이순신을 나라를 지켜낸 영웅이 아니라 개별성을 유지하기 힘든 전쟁터에서 개별성(혹은 개별적인 죽음)을 유지하려는 소망을 지닌 인물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재해석을 통해 『칼의 노래』는 인간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실존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상징적 질서 바깥으로 나가 단독자로 살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만이 순종하는 신체가 아닌 자율적인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이다.

흔히 『칼의 노래』를 두고 한국 역사소설에 뉴웨이브 역사소설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형식을 출발시킨 소설이라는 칭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칼의 노래』에서 새롭게 태어난 포스트모던 이순신 탓임은 물론이다. (류보선, 국어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