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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연 강력한 학계의 화두는 ‘통섭’이다. 어떤 이들은 ‘융복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 어디를 가나 좀 엄숙한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포도주’라는 신성한 사물과 더불어 ‘통섭’이나 ‘융복합’이라는 단어가 화제의 중심이다. 아무래도 근대 세계를 넘어설 필요성이 절실하고 절박한 까닭일 것이다. 일찍이 어느 곳에선가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은 라파엘로를 꿈꾼다’고 한 적이 있다. 이를 우리가 아는 범위의 용어로 바꾸자면 우리 모두는 르네상스인을 꿈꾼다는 말이 될 것이고, 좀더 상식적인 말로 바꾸자면 인간 모두는 ‘팔방미인’이라는 강렬한 꿈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어느 시기까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기까지는 인간들은 ‘팔방미인’들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잘했다. 가령,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위대한 화가이자 위대한 과학자였으며, 다산 정약용 역시 위대한 사상가이자 큰 업적을 남긴 건축가였다. 이들뿐이겠는가. 그들의 후예들인 칸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수학가였으며, 한국의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에 서 있었던 최남선과 홍명희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할 정도로 모든 영역을 망라한 지식인이었다. 한데,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인간 사회를 가로지른 삶의 형식은 분업이 된다. 모든 것을 나누어서 하게 되고, 각 인간들은 그렇게 쪼개진 한 영역을 파고들며 한 평생을 사는 삶을 살게 된다. 학문 역시 마찬가지였음은 물론이다. 근대 이후 학문은 분화된다. 하나로 묶여져 있던 학문의 세계가 문학, 역사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수학, 화학, 해양과학, 기계공학 등으로 분할되고, 특히 인문과학과 자연과학(혹은 공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분업은 일의 효율성을 높여 인간 사회를 급속도로 발전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업체계 혹은 학문의 분화는 인간의 삶의 형식을 진화시킬 지는 몰라도 인간의 삶의 질을 진보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특히나 9·11이나 3·11, 그리고 최근 전세계의 금융위기 사태 등 일련의 사건은 어느 한 분야에만 정통하고 전문적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인간은 분업형 인간 대신에 전인적 존재를 다시 꿈꾸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크로스오버’가 적극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시대의 흐름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체 전부의 행복을 위한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고 점점 더 열악해가는 지구적 상황을 가치 있는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런 통섭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가장 먼저 일깨운 책을 지목한다면, 아무래도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부제를 단 『대담『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권위자인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의 대담집이다. 한국의 인문학자 중 가장 심오하고 도저한 인문학자로 평가되는 도정일 선생과 동물행동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며 과학을 실험실 바깥으로 꺼내어 대중의 삶의 일부로 만든 학자로 명성이 높은 최재천 교수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인간의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등에 대해 그야말로 말의 성찬 혹은 격렬하면서도 풍부한 지성의 향연을 벌이는 한편, 그 과정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합쳐져 도달해야 할 길,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과 ‘호모 심비우스(공생인간)의 번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인간의 가치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인문학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혹은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 자연과학이 만나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 없는 값진 성찰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결론도 결론이지만 이 결론을 얻기까지의 팽팽한 토론의 과정만을 보더라도 학문간의 통섭이나 융복합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한데, 이 대담에서 유독 자주 언급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책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이다. 제가 얼마 전에 번역한 윌슨 선생님의 『통섭(統攝, Consilience)』에 옮긴이 서물을 쓰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쳐놓은 학문의 울타리 따윈 거들떠보지 않죠. 학문의 경계란 자연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거니까요. 진리는 학문의 국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음대로 넘나드는데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학문을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창 틈으로 새어들어 오는 가는 빛줄기만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단순히 학제 ‘간(inter)’ 연구로는 안 됩니다. 여러 학제를 단순히 통합하는 ‘멀티(multi)’ 학문으로도 부족합니다. 이제 ‘인터’, ‘멀티’라는 단순한 조합을 넘어서 ‘트랜스(trans)’룰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과가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굳게 닫은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 탄생해야 합니다.……그래서 윌슨 선생님은 물론이고 저도 21세기의 학문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겁니다. 통섭해야 합니다. 여러 학문들이 모여 일관된 이론의 체계를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학문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여권을 검사하는 절차는 생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통섭』이 없었다면, 『대담』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다시말해 에드워드 윌슨의 모든 학문 영역을 망라한, 특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원리를 통합한 새로운 학문의 탄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없었더라면,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이 이 깊은 담화는 훨씬 후대에나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만큼 『통섭』은 모든 학문이 소통하여 만들어내는 큰 진리의 필연성을 앞서서 제안한 선구자적인 책이다. 다음은 『통섭』의 결론이다. 다음의 구절만으로도 ‘통섭’이 21세기 학문의 가장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다음의 구절의 선구자적 존재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실재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접하다 보면, ‘통섭’은 더 이상 미래형의 과제가 바로 이 순간부터 우리가 몰두해야 할 시대사적 과제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통섭에 대한 탐색은 처음에는 창조성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가 맞다. 통합된 지식 체계는 아직 탐구되지 못한 실재 영역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이것은 이미 알려진 것에 관한 명확한 지도를 제공하며 미래 연구를 위한 가장 생산적인 질문을 창안한다. 과학사학자들은 올바른 답변을 하는 것보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종종 관찰한다. 사소한 질문에 대한 옳은 대답은 별것 아니다. 그러나 옳은 질문은 그 정답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주요한 발견의 지침이 된다. 미래 과학의 여정이나 상상력 풍부한 예술의 비행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 ‘통섭’이 오직 우리가 나아가야 할 가장 분명한 출발점이다. (국어국문학과, 류보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