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으로 읽는 영화

이안 감독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제 85회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봤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영화에 관한 한 문외한이다. 어떤 편인가 하면 문외한이면서도 전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질 나쁜 문외한이다. 영화를 보기보단 그 시간에 소설을, 시를 읽는 편이 보다 진리에 근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란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를 차단해버리는 파시스트적 형식이라는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오래된 선언들을 방패 삼아 영화를 저만치 두고 살고 있는 중이다. ‘적과 동침’ 하며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느니 소설 읽기에 집중하는 생활 습관을 고집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니 내 인생의 영화목록은 형편없다. 초라하고 황폐하기까지 하다. 그마나 내가 본 영화들도 일부러 찾아본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어쩌다, 우연히 본 경우이다. 그렇게 우연히 본 영화 중에 하나가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었다. 개봉 때 화제가 되었던 『아이스 스톰』 『헐크』, 『브로큰백 마운틴』, 『색계』 등이 이안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지만, 내가 본 이안 감독의 영화는 『와호장룡』 그 하나였다. 놀라운 영화였다. 아니 놀라운 신세계였다. 무협지를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니! 그리고 무협지적 활극을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구현해낼 수 있다니!

그 이안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라이프 오브 파이』였다. 『와호장룡』만큼 아름다웠고, 『와호장룡』만큼 기발하고 기묘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카데미가 영화를 제대로 알아볼 때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잘 빚어진 영화였다. 특히나 영상미는 압도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원작을 읽으면서 이건 그 누구도 영화로 만들기 힘들겠구나 했다는데, 이안 감독은 우리가 소설을 보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압도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바다 밑에서 펼쳐지는 바다 동물들의 환상적인 움직임, 고래가 점프하고 날치가 날아오르는 장면, 그리고 가상의 식인섬의 동화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풍경 등등,

그런데 이 영화가 이처럼 문제적일 수 있는 데에는 이안 감독의 역량 말고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니 이미 짐작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바로 원작소설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파이 이야기』(공경희 옮김, 작가정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얀 마텔의 『Life of Pi』를 각색한 영화다. 몇몇 변화가 가해진 디테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얀 마텔의 원작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겼다는 느낌이다. 아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원작이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큰 변화 없이 그것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래서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세간에 화제가 된 것처럼 호랑이와 생존투쟁을 벌이고 우정을 나누는 모험담이 전부인 영화도 아니다. 앞질러 말하자면 『라이브 오브 파이』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영화이고, 인간의 저 밑바탕에 숨어 작동하는 인간 본성을 예리하게 짚어낸 영화이다. 말하자면 결코 가볍지 않은 철학이 담긴 영화라고나 할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 아름다운 영상 속에 원작의 그 무게를 성공적으로 옮겨 심는다. 원작도 그러하지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단순히 ‘파이’라는 청년이 뜻하지 않게 겪는 기상천외의 모험담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동물들과 한 배에서 생존투쟁을 벌이는 파이의 모험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영화 끝부분의 반전을 위한 예비 단계일 뿐이다. 난파한 배의 보트에서 호랑이인 파커와 벌이는 사투가 끝나면 드디어 반전의 드라마가 시작되고, 그 장면 이후로 이 영화는 모험 영화에서 심오한 철학적 우화로 도약한다. 여기 227일간 태평양을 표류한 한 소년이 있다. 인도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과 같이 배에 오른 한 소년은 227일이 지나 가족 모두를 잃은 채 저 멕시코에서 발견된다.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파이’만이 안다. 아니, ‘파이’도 알 수 없는지도 모른다. 227일 동안 태평양을 떠돌며 그는 작은 구명선 위에서 홀로 생존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악마적이고도 외설적인 실재들이 난무하는 원장면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말자하면 상징질서 너머의 외설적인 실재에 맨몸으로 노출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 원장면들을 계속 떠올리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의식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그것을 억압하고 그 위에 덮개-기억을 씌운다. 일종의 환상 혹은 로망스로 그것을 덮는다고나 할까. 아니, 그렇게 덮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집요하게 귀환하는 원장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끝내는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 마지막 파이가 파커와 벌이는 생존투쟁과 모험담 말고 인육과 식인이 난무하는 잔혹하고 끔찍한 드라마를 하나 더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어떤 이야기 더 낫느냐고 혹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느냐고? 그리고 답한다. 파이와 파커와의 투쟁과 우정 이야기가 보다 더 나은 이야기라고. 

종합하자면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파이가 호랑이 파커와 227일 동안 벌이는 생존투쟁과 우정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원장면을 그 이야기로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참담한 투쟁이 펼쳐졌던 227일 동안의 모험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이렇게 참담한 실재들을 은폐하고 보다 나은 이야기를 현실로 믿으며 살아가는 부조리한 존재라는 뼈아픈 성찰의 영화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이란 그렇게 보다 나은 이야기 속에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사는 존재들이니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휴머니즘적인 전언을 담고 있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것이건 간에 『라이브 오브 파이』는 파이의 활달한 모험과 아름다운 영상 속에 이처럼 깊이 있는 교훈을 아로 새겨 놓고 있거니와, 그런 만큼 대단히 문제적인 영화라 아니할 수 없다.

반복되는 감이 있지만, 그러나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의 문제성을 논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히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없었어도 『파이 이야기』는 지금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아도 꾸준히 독자들을 만났을 터이지만, 『파이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세상에 선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안 감독은 『라이프 오브 파이』로 두 번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고 수상소감에서 신에게 감사를 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라이프 오브 파이』에 종교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까닭에 선택한 수상 소감일 터이다. 좁은 속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안 감독은 누구보다도 얀 마텔에게 감사 인사를 나누었어야 했던 것 아닐까. 이안이 원작자인 얀 마텔에게 어떤 식으로 감사를 전했는지를 알 길이 없지만, 나는 『파이 이야기』와 『라이프 오브 파이』를 있게 해 준 얀 마텔이 한없이 고맙다.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