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100


남 기 혁(국어국문학과 교수) 편


『조선을 생각한다』 /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 학고재


한국의 문학과 예술이 지닌 특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매우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은근과 끈기,․ 곡선의 미학,  한의 정서,․ 신명,․ 풍자와 해학 등의 정서적 ․ 미적 특질을 통해 이른바 ‘조선적인 것’(한국적인 것)의 에센스를 밝히고 이것이 한국의 문학과 예술의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심미의식이자 세계관임을 입증하려는 노력이 식민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적인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은 주체성의 발로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은 한국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미지)을 스스로 그려내려는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력은 자기정체성의 규명을 위해서, 자기 문화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 언제든 되풀이되어야 한다. 특히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가 제창되거나, 문화적 정체성의 변모가 요청되는 시대에는 지나온 시절 자기의 예술과 문화를 되돌아보고, 거기에서 ‘억눌린 것’들을 발견하고 되살려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식민지 시대나 전후의 문학비평가와 예술사가들이 소위 전통의 문제, 민족적 특질의 문제에 대해 숱한 논쟁을 벌였던 것도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적인 것’의 자기 인식이 타자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을 생각한다』라는 저서의 문제성이 놓여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1년에 향년 72세로 타계하기까지 한국 미술에 관한 숱한 평론과 연구서를 펴낸 미술사가이다. 조선과 조선인, 조선미술에 대한 그의 한없는 애정과 깊이 있는 학술적 논의는 동시대 한국의 문인과 예술사가들에게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1920년대 초반 수  차례에 거쳐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열고 언론인 ․ 문화인 ․ 예술인과 교유하는 가운데 조선 미술과 관련하여 왕성한 문필활동을 펼쳐 깊은 인상을 심어준 바 있다. 특히 부정적 조선(인)관를 지니고 있었던 대부분의 당시 일본 지식인들과 달리 야나기는 매우 긍정적 ․ 예찬적 태도로 조선(인)에 접근하였다.


  조선에 대한 야나기의 관심은 가족 중 일부가 조선에 관료도 파견되었던 것, 일부 지인을 통해 우연히 조선의 민예품 특히 도자기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3․1 운동의 폭력적 진압을 목격하면서 야나기는 <조선 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면서 ‘독립’이 조선인의 이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경주 ‘석불사’과 관련된 비평문에서는 “작가가 이 예술들을 남기는 데서 얼마나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고 얼마나 균제(均齊)의 미를 준비하고 얼마나 개개의 것을 하나의 종합으로 이끌고 얼마나 아름다움 속에서 종교를 살렸는가”를 밝혀내면서 조선 예술에 대한 깊은 사모의 감정을 표출하였다. 『조선을 생각한다』는 야나기가 조선과 조선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1920년경부터 1934년 사이에 발표한 조선 관계의 모든 글을 수록 ․ 편찬한 것이다.


  조선과 조선 예술을 바라보는 야나기의 시선에는 식민사관의 영향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20년대 초반의 글에서 야나기는 조선 예술이 지닌 특징을 ‘비애의 미’, ‘선의 예술’, ‘백(白)의 의미’로 규정하고 한국의 역사를 ’비애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야나기는 1930년대 들어와 조선 민예와 민화의 세계에 깊이 침잠하면서 조선미의 특질을 ‘무작위(無作爲)의 미’, ‘친근’, ‘소박’, ‘자연미’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기에 이른다. 사실 오늘날 한국 역사와 문화의 특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한 부분이 야나기의 시선에서 유래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야나기에 의해 시도된 조선미의 특질에 관한 논의는 상당 부분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조선과 조선 예술에 대한 그의 우호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선 예술은 일본 예술 혹은 서구 예술의 타자로서 그 특질이 규명되고 있다. 또한 이 특질을 조선인의 민족성과 결부시켜 논의하는 대목에 이르면 야나기의 시선이 내면적으로 식민의 논리를 상당 부분 승인하는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조선미의 특질을 조선적인 것의 고유성과 관련지어 논의하는 것은 미의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한국미의 특수성과 개별성이 고유성으로 축소되는 순간 한국미는 보편성의 국면과 단절된다. 그것은 세계의 미술, 세계의 예술, 인간의 보편적 가치 추구의 차원과는 단절된 위치에서 한국미의 특성을 논의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얼마간 이런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우리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미의 특성을 고유성과 관련지어 논의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민족의 문화와 예술에는 없는 -타자의 눈에- 낯설고 예외적인 것을 우리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찾는 한국의 미는 우리 시대의 삶과 단절된, 박물관에나 전시되어야 할 낡고 무력한 전통으로 축소되고 만다. 야나기의 시선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무한히 신뢰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