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100
이 일 수(영어영문과 교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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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 보르헤스 지음. |
근절되고 파묻혀야 할 것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세계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백인중심의 서구사회, 좀 더 좁혀 말하자면 미국의 패권이 정치는 물론이고 문화예술 전반에 관철되어가던 20세기 상황에서 그의 독특한 예술세계는 전세계독자의 반성과 사유에 큰 자극이 되고 있다. 그의 초기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보르헤스 특유의 예술적 실험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비평적 의의가 크다.
우선 작품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작품은 관성에 젖은 우리의 인식체계를 뒤흔들고 질문한다. ‘세계사’ 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심상들, 예컨대 역사상 중대한 사건들과 그 주역들을 이 작품에서 찾아보기란 불가능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이른바 근대세계의 발전과 진보에 기여를 한 인물은 없다. 오히려 그들은 근대세계가 무척이나 경계하고 근절하고자 애썼던 비이성적, 본능적 삶의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또한 그들은 세계 도처에 산재해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녀 악당들을 묶는 공통점은, 그들이 잔인하거나 대담하거나 무모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어보인다. 그들은 세계 각 곳에 산포되어 있어서 미국과 일본, 중국과 유럽의 어떤 현장에 예측 불가능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이 인물들 각 개인의 삶의 산포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이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주는 요소는 시간이다.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보르헤스의 언어실험에 핵심이 있다고 본다. 보르헤스의 언어는 마치 구글 지구본 검색엔진이 지구상의 한 동네로 줌업해 들어가듯이 매우 임의적이고도 동시다발적으로 세계 각지에 악명을 떨친 악당 개개인들의 삶의 순간에 집중한다. 거대한 주어에 무게가 실린, 통사적 세계사가 아니라 공시적이고 형용사적인 세계사라 할 만하다. 또한 보르헤스의 서사가 명시적으로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진 않지만, 지극히 경계하는 바가 있다면 이는 바로 언어가 장착 또는 취해야 마땅하다고 더러 주장되기도 하는 도의적 전제들 혹은 일관된 주관성이다. 언어는 이러한 의관들을 모두 훌훌 벗어던진, 그 자체로서 독자에게 전달되는 구조다, 라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듯하다.
바닥의 언어로 아픔을 말하기
악당들의 잔인무도한 행각들은 작가의 입장에서 일체의 가치판단을 생략한 채 거의 산뜻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한 어조로 제시된다. 등장인물 그 누구도 머리를 짓누르는 상념이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로 말미암아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으며, 그들 주변으로 펼쳐진 세상은 그들이 사는 방식만큼이나 느닷없고 임의적이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서 작중 화자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마차의 의자에는 마치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두 개의 기타가 세워져 있더군요. 마치 더 이상 우리에게 축제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을 것처럼 내버려져 있는 기타를 보자 쓰디쓴 고통이 가슴 안에 밀려들어오더군요. 우리들이 아무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구요. (중략) 나는 이미 다음날이 되어 있기를 바랐고, 마음은 어서 그 밤으로부터 탈출해버리고 싶은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온세상이 현재 그 자리에서 자신을 확고히 뿌리내리고 그 순간을 확실히 부여잡고자 하는 욕망으로 숨가쁘게 치닫고 있을 때, 화자는 그 숨가쁜 질주에 가담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무기력감을 달래며 현재의 오늘로부터 도망쳐 내일로 가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이 오늘의 현재를 수중에 넣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게 될 때 그 개인의 허전한 가슴을 대신 채워주는 것은 분노와 허망함임을 전달하는 데서 작가의 언어는 성취와 패배, 발전과 타락, 명예와 오욕의 대립항 사이에 드리워진 깊은 절망의 바닥에서 그 힘의 원천을 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보르헤스의 이 작품을 접한 독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세계 곳곳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악인을 자처하며 삶을 소모해버린 개인들의 이야기들을 모자이크식으로 제시한 이러한 서사를 과연 ‘세계사’로 지칭해야 할 것인가? 잘나가는 인사들의 허장성세와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놓은 온갖 제도의 그물망이 미처 건져 올리지 못한, 잔류하고 있는 찌꺼기와 진흙이 난무하는 바닥에서도 세계는 그 나름의 이야기를 구성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인정한다 치자. 그러기에 더더욱 거대한 담론과 그를 구성해가는 주역들의 됨됨이를 반성하고 갈고 다듬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