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100

신 영 화 (사회복지학과 교수) 편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시티즘』 / 앤서니 기든스 지음  - 새물결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사랑밖에 난 몰라’하는 노래가사나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제목처럼 사랑은 세대와 시대를 망라하는 관심 주제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 교양과목 ‘성과 가족’을 강의하면서 청춘의 열정 덕분에 강의실은 뜨거웠고 자료실 카페는 열띤 질의응답으로 호황을 누렸다. 다분히 교과목 제목과 청년들의 섹스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어부지리였다. 이 과목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성과 사랑은 개인의 사회적 행위이며, 상호평등한 관계에서 자기결정을 하는 선택적 행위’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는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성기와의 대화’, ‘작업하기’ 등의 자극적인 과제로 학생들을 유인하였다.

앤소니 기든스는 재생산(임신과 출산)이 자연의 섭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현대 이전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자연으로부터 이미 결정되어 주어지는 것이었으나, 재생산 없는 섹슈얼리티(피임)와 섹슈얼리티 없는 재생산(시험관 아기 등의 기술발달)이 모두 가능해진 현대사회에 성은 더 이상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로 변화하였다고 설명한다. 전통사회에서 결혼과 성은 재생산 기능을 가지는 가족제도의 근간이었다. 최근 전세계적인 ‘늦은 결혼’과 ‘저출산’현상은 섹슈얼리티의 진화와 관련이 있다. 기든스는 이런 현상을 ‘조형적 섹슈얼리티(plastic sexual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섹스하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자식을 낳고 ‘백년해로’ 하는 전통적인 사랑과 결혼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친밀성과 애정에 기초하는 관계 내적인 속성에 기초하는 ‘순수한 관계(pure relationship)'가 중요시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섹슈얼리티는 친밀한 관계에 이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섹슈얼리티를 좌우하는 외적인 조건이 희박해지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질 때 순수한 관계가 성립한다. 관계 내적인 속성인 애정과 친밀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더 이상 혼인관계에 있는 기혼남녀의 애정에는 안전지대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사랑을 발견했을 때 결혼관계는 미련 없이 끝난다. 아니면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사양하는 비혼족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기든스는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개념을 도입하여 공존의 대안적 친밀성을 제안한다. 합류적 사랑이란 두 사람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존의 감정을 교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함께 형성해가는 사랑을 말한다.

기든스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에서 여성의 역할에 주목한다. 가부장적 산업사회에서 여성은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에 남성은 노동의 공적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결혼제도를 기반으로 한 여성의 역할은 가정에 종속되고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즉 결혼제도에서 여성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결혼을 유지하는 책임과 의무에 속박된다. 사실상 여성은 가족성원의 심신을 돌보는 감정노동의 달인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진출한 대표적인 직업분야 역시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가족내 돌봄노동의 연장선에 있다.

기든스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처한 자기희생과 학대적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민주주의로서 친밀성을 제안한다. 섹슈얼리티와 친밀한 관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민주주의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성과 친밀성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감정적 요소에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결혼과 가족제도라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성과 친밀성이 거시적인 성의 상품화와 성에 관한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관점에서는 친밀성의 민주화에 주목할 만하다. 가부장제의 권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동질성을 모색하고, 동질성에서 차이를 모색하는 친밀한 관계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성과 가족 과목에서 내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선택하는 사랑’, ‘함께 그리고 홀로 하기’와 이 부분에서 일치한다. 저자는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 친밀성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